문해력 [송두율 칼럼]숫자 너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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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송두율 칼럼]숫자 너머의 세계

이길중 0 2
문해력 우리의 하루는 숫자로 시작해서 숫자로 끝난다. 정해둔 기상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온갖 숫자의 흐름 속에 있지만, 마시는 공기처럼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생활한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숫자는 인도에서 기원한 아라비아 숫자다. 0부터 9까지의 십진 기수법은 711년부터 약 8세기 동안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이슬람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이 숫자의 활용을 빠른 속도로 확산시켰고,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중국에 이어 개화기 초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여러 숫자 표기 방식이 있었음에도 아라비아 숫자가 문화와 언어를 넘어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숫자 기호가 10개뿐인 덕에 배우기와 기억하기가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되며 실용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중세 세계관에서 하느님은 숫자와 무게와 척도로 세상을 창조했다. 그는 수와 질서를 신학적 질서의 기초로 삼았다. 하지만 근세의 갈릴레이는 자연이라는 책이 숫자라는 언어로 쓰였고 인간 이성이 그 법칙을 해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합리적인 세계관의 길을 열었다.
이런 역사적·철학적 배경을 지닌 숫자는 문명의 보편적 도구가 됐고, 그 적용 없이는 어떤 과학도 성립될 수 없다. 또 숫자는 통계, 고용, 소득, 선거, 순위 등 사회생활 곳곳을 규정하며 경쟁과 갈등의 정당화에 쓰이기도 한다. 미국 과학사학자 시어도어 포터는 그의 <숫자를 믿는다>에서 숫자의 특별한 역할은 과학 발전의 결과라기보다 행정 관료가 자신들의 행위와 결정을 표준화된 소통 수단인 숫자를 통해 정당화해온 결과라고 주장한다.
작년 4월 윤석열 정권의 검찰은 문재인 정부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집값 통계를 조작했다며 국토교통부 장관 등 고위 간부들을 재판에 넘겼다.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 사건은 그러나 다시 정권이 바뀐 뒤 검찰이 혐의를 ‘변동률 조작’이 아니라 ‘변동률 수정’이라고 바꾸면서 향방이 달라졌다. 조작과 수정은 서로 다른 행위다. 문제의 본질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숫자의 해석이 뒤집히는 현실 자체이다.
숫자 통치로 사회적 연대 위협
또 12·3 내란이 획책되던 밤에 계엄군이 선관위의 전산 시스템 확보를 시도한 이유 역시 총선 참패 뒤 국민의힘이 줄곧 주장해온 부정선거 의혹을 입증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선거 결과가 사전에 프로그램으로 조작된 숫자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제기한 음모론처럼, 투표 결과가 조작된 숫자라는 믿음은 현대사회의 조용한 지배자인 숫자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통념을 뒤흔드는 사례가 되었다. 권력의 취향에 따라 숫자에 대한 신뢰와 불신이 오락가락한다는 현실은, 숫자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어떤 입장을 정당화하는 무기임을 보여준다.
이 문제와 관련해 프랑스 법사회학자 알랭 쉬피오는 <숫자에 의한 협치>에서 숫자가 겉보기에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도구 같지만, 사회를 조직하고 조정하는 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경고한다. 전통적인 법적 문제 해결을 숫자로 치환하면서 법치가 수치로 대체되고, 이 과정이 탈정치화를 가속해 사회적 연대와 민주적 합의를 위협한다고 말한다.
‘숫자는 속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숫자로 표시되지 않거나 표시될 수 없는 것은 거짓에 가깝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지표가 있는 분야는 중요해 보이고, 지표가 없는 분야는 존재 자체가 흐릿해진다. 그래서 실업률, 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율, 범죄율 등은 자연스럽게 한 사회의 건강성을 판단하는 믿을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장보기가 무섭다는 말이 나와도 공식 인플레이션율은 변하지 않는다며 불만이 제기된다. 우리는 숫자의 조작 여부에 앞서 무엇을 센 숫자인지, 누가 셌는지, 어떤 맥락에서 이 숫자가 ‘진실’이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문제는 숫자 그 자체보다, 숫자가 진실을 완벽히 드러낼 것이라는 과한 기대에 있다.
숫자의 힘은 거시적으로 우리 삶을 통제할 뿐 아니라 개인의 일상도 깊숙이 지배한다. 가령 건강 체크에 필요한 혈압 120/80, 공복혈당 100, 수면 점수 80, 체질량지수 25 같은 숫자는 어떤 이에게는 안도감을, 어떤 이에게는 불안감을 준다. 매일 1만보, 5㎞ 걷기 같은 건강 수칙도 스마트폰의 건강 앱이 반복적으로 경고를 띄우기에 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이 온종일 따라붙는다.
삶의 진짜 얼굴은 숫자 바깥에
요절한 독일의 극작가이자 의사였던 게오르크 뷔히너(1813~1837)의 미완성 희곡 <보이체크>에는 가난한 군인이 돈을 벌기 위해 의사의 실험체가 되어 석 달 동안 완두콩만 먹으며 여러 검사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반대로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큰돈을 내며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인공지능의 광범위한 활용은 건강과 관련된 정교한 정보와 수치를 무수히 제공하며,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환자가 의사가 된 듯한 착각을 준다. 디지털 극대화를 통해 숫자는 개인의 자아실현을 직접 확인시켜주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랭킹과 서열 역시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숫자의 세계다. 쇼펜하우어가 “비교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 했듯,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여중생의 목소리는 학교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학교의 우등생은 사회의 열등생’이라는 말이 있지만, 성적순과 학교 서열은 직업과 사회와 연동되며 한 개인의 일생을 여전히 강하게 지배하는 숫자의 힘을 보여준다.
윤석열 탄핵 이후 주술과 역술 관련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손바닥의 ‘왕(王)’ 자, 김건희가 경복궁 근정전 옥좌에 왜 앉았는지, 11차례의 경복궁 방문 시간이 왜 오후 5시였는지, 계엄 발표일인 12월3일이 왜 123이라는 숫자 배열인지 등 여러 궁금증에 주술적 해석이 따라붙는다. 동아시아에서 4를 기피하고 길일을 택하는 문화, 서양에서 13을 피하고 7을 좋아하는 문화, 모두 숫자가 차갑고 중립적인 도구만은 아니라 삶의 근저에 깔린 신비적 힘의 상징임을 드러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고의 구조는 유사하고 차이는 내용이나 형식에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렇게 숫자가 어떤 주술적 의미를 띠지만, 수없이 제시되는 미래에 대한 예측모델이나 통계수치도 확실성의 환상을 알게 모르게 심어준다.
이렇게 우리는 숫자로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하루 동안 수없이 많은 숫자를 만난다. 시간, 온도, 계좌 잔액, 걸음 수, 증권 지수, 실업률, 수능 점수, 정당 지지율 등 한이 없다. 숫자는 편리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명함이 오히려 삶의 결을 단순하게 만들거나 흐리게 할 때가 많다. 숫자는 우리를 대신해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숫자는 조각을 세는 데는 능하지만, 그 조각들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실제 세계는 서로 닿아 흔들리고 영향을 주고받는 그물망과 같은 것이다. 어떤 성장은 누군가의 소멸을 동반하기도 한다. 관계를 보는 눈이 있을 때 비로소 숫자의 그림자가 드러난다. 숫자를 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숫자만 믿기 시작하는 순간, 세계는 눈에 띄게 얇아진다. 손에 잡힐 만큼 편리해지는 대신, 손끝에서 새어 나가는 것들이 많아진다.
숫자는 언제나 결과만 보여준다. 과정의 숨결, 사람의 마음, 상황의 결은 잘 남지 않는다. 실업률이 낮아도 누군가의 불안은 여전하고, 한 학생의 조용한 노력과 장래의 꿈은 이른바 SKY의 예상 합격점수 속에서 희미해진다. 그래서 때때로 숫자 너머를 천천히 바라보고 상황의 맥락을 짚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야말로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부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숫자에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숫자는 편리하고, 때로는 우리를 보호해주기도 한다. 다만 가끔은 숫자 바깥을 바라볼 여유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곳에는 숫자로는 드러나지 않는 따뜻함과 서늘함, 실패와 기쁨, 그리고 삶의 진짜 얼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잔해 재조사가 유가족의 촬영 금지 조치 항의로 중단됐다.
14일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 협의회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30분 무안국제공항에서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 조사관 2명과 사무국 직원 1명,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직원 20명, 유가족 20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재조사가 시작됐다.
11개월간 공항 노지에 방치된 잔해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유가족 요청에 따른 절차였다.
국과수는 시신 수습 당시 수준의 정밀 조사를 재실시하고, 시체 파편 등이 발견될 경우 유전자 감식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조사는 차양막을 걷고 현장 상태를 확인한 뒤 절차를 논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을 하자 사조위 조사관들은 “사고조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촬영을 제지했다.
유가족들은 즉각 반발했고, 현장은 약 2시간 대치가 이어졌다.
사조위는 이후 “촬영은 허용하되 근접 촬영은 제한한다”는 수정 입장을 제시했으나, 유가족들은 조치의 일관성 부족과 태도 등을 문제 삼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날 조사는 낮 12시30분쯤 최종 중단됐다.
재조사 일정과 방식은 향후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중국군 정보조직에 돈을 받고 군사기밀을 넘긴 혐의로 기소된 현역 병사가 중형을 선고받았다.
제3지역군사법원은 11일 일반 이적과 군기누설, 부정처사후수뢰, 정보통신망법 위반, 성매매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병장에게 징역 5년과 1800여만원 추징 명령을 내렸다.
법원에 따르면 A병장은 지난해 8월 휴가 때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 정보조직 조직원에게 스마트폰 IP전송프로그램을 통해 군사기밀을 넘기기로 약속했다. A병장은 부대 복귀 후 한미 연합연습 ‘을지 자유의 방패’(UFS) 관련 문서를 찾아서 보내라는 지령을 받았고, 이후 부대 PC를 활용해 관련 자료를 보냈다.
A병장이 넘긴 해당 문건은 미군이 작성해 한국군에 전파한 것으로, 주한미군 주둔지 명칭과 병력증원 계획, 유사시 적 정밀타격 대상이 될 수 있는 표적 위치 등이 포함돼 있었다. 또 한미 연합연습 업무 담당자들의 소속·계급·성명·연락처 등 개인정보와 한미연합사령부 교범 목록 등도 담겼다. 그는 군사기밀을 넘긴 대가로 7차례에 걸쳐 1800여만원을 받았다.
한국인 부친과 중국인 모친 사이에서 2003년 중국에서 태어난 A병장은 2008년 약 5개월 정도 한국에서 생활한 것 외에는 대부분을 중국 베이징에서 성장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외조부모와 함께 생활했으며, 외조부는 2005년 퇴역한 중국 로켓군 장교 출신으로 조사됐다.
재판부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현역 군인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그에 합당한 처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질타했다. 이어 “특히 중국으로 건너가 조직원과 세 차례 접촉하고 이적 대가로 상당한 금액을 수수한 점, 범행을 쉽게 하기 위해 장비를 무단으로 영내에 반입하는 등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범행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며 “다만 지금까지 다른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과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점 등을 참작해 형을 정했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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